김충환 경기권역장

금융의 역사에서 지금처럼 '돈의 형태'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 시기는 드물다.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단어가 일반인에게 아직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이미 글로벌 금융 인프라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정책 당국의 대응 속도를 앞서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암호화폐 이야기가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유로 등 법정화폐나 자산에 1대1로 연동된 디지털 화폐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오르내리지 않고 가치가 고정돼 있어 결제·송금·운용 수단으로 쓸 수 있다. 2026년 6월 기준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3,160억 달러(약 430조 원)다. 2020년 말 270억 달러에서 12배가 됐다. 테더(USDT)가 약 1,870억 달러(점유율 59%), 서클(USDC)이 약 750억 달러(24%)로 두 종목이 전체의 83%를 차지한다. 나머지 발행사 중 점유율 3%를 넘는 곳은 없다. 사실상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결제·송금에서 사용되는 조정 거래량은 연간 약 9조 달러로 전년 대비 87% 증가했다(a16z 기준).
이 시장의 지각변동에 불을 붙인 것은 미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7월 18일 GENIUS Act(결제 스테이블코인 규제법)에 서명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차원 스테이블코인 입법이다. 핵심 내용은 세 가지다. 발행사는 1대1 준비자산 보유 의무(달러 현금·단기 국채), 연방 또는 주 차원의 라이선스 취득, 월별 준비자산 공시 의무. 이 법의 통과로 미국계 은행과 핀테크들이 합법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시티그룹은 2030년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1조 9,000억 달러(기본 시나리오)에서 최대 4조 달러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2028년 말 2조 달러를 제시했다.
여기서 금융인으로서 짚어야 할 핵심 맥락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급성장은 단순히 '기술 혁신'이 아니다. 이것은 달러 패권의 디지털 버전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 결제망에 들어가면 개발도상국과 신흥국 국민들이 자국 화폐를 우회해 달러를 보유하고 거래하는 경로가 생긴다. 미국 입장에서는 블록체인 위에 달러를 심는 것이고, 미 재무부 단기채 수요가 늘어나는 효과도 생긴다.
GENIUS Act가 준비자산으로 '단기 국채'를 명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테더 하나가 보유한 미국 국채가 독일 전체 국채 보유액에 맞먹는다는 사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2026년 현재 국내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2024.07 시행) 이후 후속 입법으로 추진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에 스테이블코인 규정이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의 감독권 충돌로 입법이 2026년으로 미뤄졌다.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은행 51% 이상 지분 참여를 요구하고 별도 인허가 심의위원회 설치를 주장한다. 금융위는 기존 부처 간 협의 체계면 충분하다고 맞서고 있다. 준비자산 요건, 이자형 스테이블코인 허용 여부, 감독 주체도 미확정 상태다. 이재명 정부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상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통화주권 방어' 논리를 내세우고 있고, 주요 은행들이 컨소시엄 형태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출시를 준비 중이지만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실제 출시는 2027년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전문가 시각에서 개인 투자자와 기업 CFO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두 가지다.
첫째,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해외 결제·송금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인프라로 쓰이고 있다. 국제 와이어 송금 수수료 2~5%를 스테이블코인 트랜잭션은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낮춘다. 글로벌 공급망이나 해외 거래가 있는 중소기업에게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 비용 절감 수단이다.
둘째, USDT·USDC는 달러 자산이다. 원화 약세 국면이나 환율 변동성이 클 때 달러 유동성을 보유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다만 이를 국내에서 활용하는 데 따르는 세제·규제 리스크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코인'이라는 편견으로 이 흐름을 흘려보내는 것은 1990년대 인터넷 뱅킹을 '해킹 위험'이라며 외면했던 것과 구조적으로 같다. 미국이 법을 만들었고 달러가 디지털로 전 세계에 깔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감독권 다툼으로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국경을 넘어 우리 금융 생태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법이 준비되기 전에 시장이 먼저 형성되는 것, 그것이 디지털 금융의 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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